푸른숲출판사
도서정보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김세현 저 ·푸른숲
2005. 07. 18
9,800원
A5, 148*210mm(판형) | 231페이지
8971844361

서럽고 빛나는 세상에 바치는 순결한 생의 찬가
김훈 신작장편 《개》 출간!
“나는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개 짖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개들을 대신해서 짖기로 했다. 짖고 또 짖어서,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눈부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냉혹한 역사적 현실 앞에 던져진 고독한 무인의 실존적 번뇌나 무너지는 왕국 앞에서 예술의 진정성을 찾아 국경을 넘는 한 늙은 예인의 삶을 잔혹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냈던 그가 이번엔 너무도 평범한 저잣거리의 한 마리 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과 악기를 들여다보던 눈으로 굳은살 박인 개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오랫동안 인간의 곁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덕분에 이제는 인간의 표정까지 닮아버린 개의 자리로 돌연히 옮겨앉는다.

날것 그대로인 두 발바닥과 몸뚱이 하나로 척박한 세상 속을 뒹굴며 주어진 생을 묵묵히 살아내는 진돗개 보리의 세상살이를 통해, 작가는 생명을 지닌 것들이라면 누구나 감당할 수밖에 없는 살아간다는 일의 지난함과 그 속에 숨겨진 보석처럼 빛나는 생의 의미를 잔잔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더불어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은 진돗개 수놈 보리의 눈에 비친 인간세상의 부조리들, 즉 덧없는 욕망과 집착, 의미 없이 떠도는 말들, 그로 인한 인간의 약함과 슬픔 역시 놓치지 않는다.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흔한 개의 발바닥에 단단하게 박여 있는 굳은살을 바라보고 또 어루만지며 그 안에 내재된 한 생명체의 고단한 삶의 흔적과 꿈의 기록들을 읽어내는 김훈의 이번 소설은, 부딪치고 깨어지고 또 견디고 기다리며 눈앞의 삶을 건너가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생의 찬가이다.
그가 연민어린 눈길로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버려진 개의 발바닥은 소설가 김훈의 생을 지탱해온 굳은살 박인 그의 손바닥이기도 할 것이며, 그와 함께 현재의 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단한 어깨이기도 할 것이다.

김훈
김훈 (金 薰)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하고 여러 언론사를 거치며 신문기자 등을 했다.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가 있으며,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풍경과 상처》 《문학기행》 《자전거 여행》 《밥벌이의 지겨움》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림 김세현
1963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수묵화를 중심으로 회화작업을 해왔다.
그린 책으로는 《부숭이는 힘이 세다》 《아름다운 수탉》 《모랫말 아이들》 등이 있고 펴낸 그림책으로 《만년 샤쓰》 《외딴 마을 외딴 집에》 등이 있다. 제4회 출판미술대상을 수상했다.

- 작가의 말

1부
2부
3부
4부

나는 날지를 못한다. 나는 개이므로 고향이 있고, 주인이 있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고 주인의 집에서 잔다. 나는 개이므로 네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박차고 달리고, 땅 위의 모든 냄새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고향이며, 사람의 냄새가 나는 모든 주인들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개보다 사람들이 더 불쌍해 보일 때가 많다. 불쌍해 보일 때, 사람들의 어깨는 기가 죽는다.
어깨가 늘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동자가 초점을 잃으면 그건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는거야. 사람들은 따스한집과 옷과 밥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이웃과 논밭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우물을 파고 땀흘려 논밭을 일구는 거야. 또 죽은 사람도 잊지 못해서 산소를 만들고 다들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거야.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 살아가지를 못해. 나는 좀더 자라서 그걸 알았어.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41-42
또 노는 아이들 곁에 가서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의몸 속에서 피가 돌아가고 숨이 들고 나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 가득 아이들이 뛰어놀 때 그 소리는 다 합쳐져서 바람이 잠든 날에도 봄의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이들의 몸 속을 돌아가는 피의 소리는 작은 냇물이 바위틈을 빠져나올 때처럼 통통거렸고 숨이 드나드는 소리는 어린 대숲 속으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색색거렸다. 작지만 또렷한 소리였다. 99
짖을 때, 소리는 몸통 전체에서 울려나와야 한다. 입과 목구멍은 다만 그 소리에 무늬와 느낌을 주면서 토해내는 구멍일 뿐이다. 몸 속 전체가 울리고 출렁대면서 토해지는 소리가 진짜 소리다. 소리는 화산처럼 터지면서 해일처럼 몰려가야 한다. 나는 짖어야겠다 싶으면 몸 속 깊은 곳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그때 내 몸 전체는 악기로 변하는데, 이 악기는 노래하는 악기가 아니라 싸우려는 악기다. 악기가 무기인 것이다. 113
싸울 때 내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서 슬프고 외롭고 다급하다. 싸움은 혼자서 싸우는 것이다. 아무도 개의 편이 아니다. 싸우는 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 싸울 때, 미움과 외로움은 내 이빨과 뒷다리와 수염으로, 내 온몸으로 뻗쳐 나온다. 으렁 으렁 으렁 소리는 그 외로움과 슬픔이 터져 나오는 소리다. 화산이 터지기 전에 땅 밑에서 용암이 끓는 소리와도 같다.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