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출판사
도서정보
잘 모르던 아이 (은이결 소설집)
은이결
2022. 08. 31
11,000원
156페이지
9791192411071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어

첫눈에 꽂힌 중학교 후배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지애의 아슬아슬한 애정 공세! _<스토커>

가정불화 속에 방치된 채 불안과 씨름하는 유경에게 
들리는 묘한 소리의 정체는? _<한 소리가 있어>

로맨스 웹툰의 주인공은커녕 첫사랑 강제 종결에 이어 
절친의 어마어마한 비밀까지 떠안게 된 자영의 얼얼한 겨울날. _<너의 시작>

엄마에게 떠밀려 머물게 된 아빠의 집, 해진은 속도 없이 
자꾸만 엉겨 붙는 의붓 여동생의 뻔뻔한 제안에 휘말리고 마는데……. _<동생년>

훌쩍 떠난 여행길에서 중학교 동급생이었던 K와 스치듯 만나, 
봉인해 둔 기억을 떠올리는 이진의 시간 여행! _<잘 모르던 아이>

가끔은 힘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건네는 다섯 빛깔 이야기


이 책의 특징
자신만의 빛깔 찾기와 관계 맺기를 고민하는 성장의 문턱을 그리다!
MZ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MBTI, 즉 성격 유형 검사에 진심이라는 점이다.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MBTI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그 결과를 신뢰한다고 한다. MZ 세대에게는 MBTI가 단순히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가벼운 테스트가 아니라 자기소개의 수단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열풍은 타인과의 관계 맺기나 채용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검사의 결과를 맹신하거나 특정 유형을 일반화해 배제하는 등의 문제점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방법은 달라도 자아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풍은 시들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이 언제나 궁금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리라.
《#구멍》으로 성장의 변곡점을 지나는 청소년들의 숨 가쁜 현실을 사려 깊은 문장으로 형상화한 바 있는 은이결 작가가 이번에는 단편 소설집 《잘 모르던 아이》로 돌아왔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한번 꽂히면 뜨겁고 집요하게 쫓는 것밖에 모르는 지애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인해 벌어진 아슬아슬한 추격전과 반전 결말을 담은 <스토커>, 가정불화로 모두가 떠나기만 하는 집에 남겨진 막막함과 불안함에 시달리던 유경에게 찾아온 환청의 정체를 밝히는 <한 소리가 있어>, 짝사랑으로 끝난 첫사랑에 억울해할 새도 없이 절친 민규의 어마어마한 고백에 명치를 얻어맞은 자영의 험난한 성장통을 다룬 <너의 시작>,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재편된 가계도에 한 발씩 걸쳐 둔 채 나쁜 딸이자 철없는 아이로 몰린 해진이 의붓 여동생의 뻔뻔한 계획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린 <동생년>, 그리고 엄청난 무게가 실린 비밀을 덥석 안긴 중학교 동급생 K와 우연히 스치는 바람에 봉인된 자신의 비밀과 직면하게 된 이진의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 <잘 모르던 아이>까지……. 작가는 나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과 ‘우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을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저 따라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스토커>
지애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한번 꽂히면 그것밖에 모르’는 지나친 열정의 소유자다. 이번에는 동네에 막 이사 온 중학교 후배 ‘쏭’에게 꽂혔다. 처음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머릿결을 가졌으면서 과감하게 투 블록 커트를 한 겉모습에 눈길이 갔다. 그러다가 엄마 심부름으로 들른 쏭의 집에서 주고받은 잠깐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굳혔다. 등굣길을 함께하며 쏭의 취향과 SNS를 알아낸 뒤부터는 뜨거운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좋은 징조’만이 가득한 나날이었다. 쏭의 일거수일투족과 친구 관계를 낱낱이 파악하고 틈만 나면 마주칠 기회를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관계가 무르익기는커녕 삐거덕거리는 불협화음을 낸다. 급기야 쏭을 쫓던 지애 주변에 이상한 일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잃어버린 물건들이 담긴 상자가 한밤중에 배달되며 오싹한 충고가 날아든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방식의 관계 맺기가 가진 폭력성을 섬뜩한 반전 속에 담아냈다.


‘흐느끼는 것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 <한 소리가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경의 집에는 가족들이 싸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지방 근무로, 언니는 대입 실패 후 가출로 집을 떠나 버렸다. 막다른 골목 끝집으로 돌아오는 건 유경뿐이다. 아니, 뜬금없이 유경의 귓가를 두드리는 정체 모를 소리도 함께였다. 당신 마음대로 해야 성에 차는 강압적인 아빠의 곁에서 막막함과 불안함에 짓눌려 있던 유경은 자신의 처지와 꼭 닮은 상자 속 강아지를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개를 좋아하는 언니를 집으로 불러들일 유인책이라고 아빠에게 변명하면서. 유경의 짐작대로 돌아온 언니는 개에게 용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살뜰히 돌본다. 하지만 유경의 신경 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지속되던 잠깐의 평화는 결국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가정불화로 인한 정서적 학대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아이의 불안한 내면을 정밀하게 그리는 동시에, 아이가 마침내 ‘골목을 벗어날 용기’를 내어 내딛는 발걸음을 안도하며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큐규, 더 못 참겠어, 고백할까 봐.” + <너의 시작>
잠룡 태권도 관장님이 아빠인 자영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로 통한다. 실상은 모태 솔로이고, 연애는 책이나 웹툰 그리고 각종 영상으로 배운 게 다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절친인 민규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에게도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 도장에 새로 온 스물일곱 살 막내 사범에게 자신은 고용주의 미성년 자녀일 뿐이지만, 자영은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감정에 푹 잠겨 로맨스 웹툰의 주인공인 양 속앓이를 하며 오빠의 주변을 맴돈다. 괜한 시기심 때문인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쪼잔한 민규의 도움 없이 고백을 감행한 디데이. 자영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찬물을 확 끼얹는 민규 때문에 고백도 못해 보고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괘씸한 절친은 원수가 되더니 죽지도 않고 되돌아와 어마어마한 비밀까지 투척해 버리는데……. 각자의 빛깔을 찾는 청소년기의 방황과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의외성과 다양한 선택지를 경쾌한 필치로 그렸다. 


“왜 나 때문이야?” + <동생년>
여름 방학을 하는 날,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일로 지구대를 방문하게 된 해진은 결국 엄마에게 떠밀려 재혼한 아빠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 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엄청난 걸 목격’한다. 아줌마를 만나는 것까지는 각오했지만,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의붓 여동생 지원과 아줌마 배 속 아기의 존재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족에 관한 기대치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빠가 이룬 완벽한 가정을 본 순간 해진의 마음은 굳게 닫혀 버린다. 그 후 온몸으로 강렬한 거부감을 내뿜는데도, 지원은 ‘언니를 가져 보는 게 평생소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쩍쩍 달라붙’는다.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 앞에선 내색도 하지 않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해진에게 의지하더니 뻔뻔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재편된 가계도 이쪽저쪽에 한 발씩 걸쳐 둔 채 죄책감과 그리움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또다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노곤하게 지쳐 버린다. 가족이 처한 중대한 문제에서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철없는 아이로 내몰리기 일쑤인 해진과 지원이 둘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나누며 껄끄러운 상황을 돌파해 내는 성장의 문턱을 담았다.


“있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 <잘 모르던 아이>
고등학교 졸업식 날, 폭설이 내린 산을 보기 위해 짧은 여행길에 오른 이진은 터미널에서 중학교 때 동급생 K를 스치듯 본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아이를 다시 만난 순간, 이진의 시간은 빠르게 과거로 물러난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이사와 전학을 간 이진은 다시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상담 센터에 들러 청소로 시간을 때우며 지낸다. 그런 이진의 단조로운 일상 속으로 상담 센터에서 만난 K가 불쑥 뛰어든다. 친절하게 말을 걸고, 소소한 것을 나눠 주고, 등하굣길과 쉬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K의 친밀함에 스며들면서도 이진은 슬쩍 마음의 거리를 둔다. 마음의 깊이가 시간에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졸업식 예행연습이 있던 날, 이진을 불쑥 찾아온 K는 엄청난 무게가 실린 비밀을 털어놓고, 이진은 매몰차게 화를 내며 K를 뿌리친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과연 이진은 K처럼 봉인된 비밀을 다시 펼쳐볼 수 있을까? 어떤 일들은 묵혀 둔 채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시 직면하는 것도 용기라는 것, 그 순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자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서정적인 필치로 그렸다. 

《잘 모르던 아이》는 센 척하며 거친 말을 툭툭 내뱉어도 말랑말랑 여린 청소년들의 속마음에 주파수를 맞추고, 뭐든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이들의 혼란스럽고도 불투명한 마음을 다정하게 끌어안는 문장 속에 녹여낸 소설집이다.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이 여러 색깔로 나뉘는 것처럼, 청소년기를 통과하며 저마다 다른 빛깔을 갖게 되는 모든 성장의 순간을 적극 응원하며 따뜻한 지지를 보내는 마음을 담뿍 담아 건넨다. 

지은이 : 은이결
2013년에 푸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청소년 소설 《칼의 아이》, 《#구멍》, 《마지막 히치하이커》(공저), 《광장에 서다》(공저)를 비롯해 동화 《최후의 탐험대》, 《별똥 맛의 비밀》 등이 있다.

스토커
한 소리가 있어
너의 시작
동생년
잘 모르던 아이

“추리 소설? 나도 완전 좋아해. 요즘엔 통 못 읽었네. 재밌게 읽은 거 있어?”
쏭이 즉시 휴대폰을 꺼내 SNS 앱을 켰다. 책 표지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 주며 주인공과 사건을 읊어 대는 동안 나는 쏭의 프로필 사진만 뚫어져라 봤다.
잠시 후 쏭이 “언니, 안녕.” 하고 중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쏭이 나더러 언니라고 했다. 좋은 징조였다.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학교 담에 붙어서 SNS를 열었다. 쏭의 학교와 관심사와 프로필 사진까지 알았으니 SNS에서 박송주를 찾는 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빨간 텐트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러느라 학교에 조금 늦었다.
어제 올린 글이 있었다.

-저랑요? 왜요?

물음표와 숫자 3을 반반씩 닮은 라면 면발 세 가닥을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무심한 듯 일상을 담은 사진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와의 일을 간접적으로 SNS에 남겼다는 건, 그것도 첫 만남을 기록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이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내가 오길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절친한 친구로 삼은 적은 없지만 이번엔 새로울 것 같은 기대감이 퐁퐁 샘솟았다. 당장 친구 신청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예전의 누군가처럼 쏭이 나의 열정을 달려드는 미친개의 광기로 오해하면 안 된다. _<스토커> 14~15쪽에서


붕대를 감은 강아지 사진 때문인지 언니가 돌아왔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어 보니 언니가 양쪽 손목에 비닐봉지를 매달고 커다란 봉지까지 품에 안고 서 있었다. 두 달하고도 열흘 만이었지만 오전에 나가서 장을 봐 온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벗었다.
“용구야~.”
언니가 솔 음으로 처음 듣는 이름을 불렀다. 안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방으로 들어간 언니를 따라가서 얼른 방문을 닫았다.
“어휴, 우리 용구 실물이 더 예쁘당!”
갑자기 용구가 된 강아지는 언니 발치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슬쩍슬쩍 꼬리를 흔들었다.
“무슨 이름이 그래?”
“용구가 어때서. 내 남친 이름이야.”
“얘, 암컷이야.”
“뭐 어때?”
언니는 용구를 달랑 들어 품에 안고 아기처럼 얼렀다.
아빠가 벌컥 문을 열었다.
“개새끼 내려놔!”
“용구 때리면 동물 학대로 신고할 거야.”
툭 던지는 가벼운 언니 말투에 ‘신고’가 흔히 있는 일상인 것처럼 들렸다.
“아빠를 협박하는 거야? 어디서 뭘 하다가 와서는…….” _<한 소리가 있어> 54~55쪽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상담사로 통했다. 우정, 연애, 가족 등등 고민을 털어놓으면 생각나는 대로 말해 준다. 민규는 나더러 ‘극단적’이라고 했다. 조언이 허황된 판타지이거나 헌법만큼이나 교과서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조언은 제법 먹혀든다. 나중에 찾아와서 “네 말대로 할 걸 그랬어.”라고 하는 아이가 꽤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게 다 수년 간 도장을 드나들며 쌓아 온 경험 덕분이었다.
주리에게 조언한 것도 경험에서 나온 것이냐고? 친구의 남자 친구를 곁눈질하기는커녕 슬프게도 이성과 꽁냥꽁냥 사귀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친구들은 남자들이 득실대는 도장에 터를 잡은 나의 연애 경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미루어 짐작하고 믿어 버렸다. 내가 모태 솔로라는 건 민규만 아는 비밀이었다. 연애에 관한 건 웹툰, 영화, 드라마, 책에서 배웠다. 스토리 속 인물들 간의 관계와 사연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의 연애 수준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 할아버지가 행복한 집은 그래 봤자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집은 사연마다 각양각색 구구절절하다고 했다는데, 열일곱 인생에서 이성과 만나는 사연은 고만고만하고, 헤어지는 이유 또한 거기서 거기다. 설령 누군가 특별한 인연이라고 우겨도 알고 보면 ‘사연 53’에 지나지 않는다. 설레고 잠 못 이루는 건 당사자뿐이었다. 주리처럼 웃고 울고 혼자서만 애틋해하다가 끝나 버린다. 친구들의 어설픈 연애 사연을 들을 때마다 다짐하고 기대했다. 나는 완벽한 인연을 만들 거라고. 나에게 꼭 맞는 남자를 잡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_<너의 시작> 74~75쪽에서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자꾸만 싸우는 것도, 결국 두 사람이 이혼을 한 것도, 식탁에 늘 약 봉투가 있는 것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잘하고 싶었지만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고, 엄마에게 고분고분하고 싶은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빠를 만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건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원하는 일이었다.
미래는 매일 구만 구천 원을 읊었고, 지원이는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아빠와 아줌마 앞에서 까르르 웃어 대다가 방에서는 몰래 울었다. 사실 몰래도 아니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괴상한 소리로 코를 풀고, 휴지통을 툭툭 건드리고, 스탠드 불을 켰다가 껐다가 했다.
사흘째 되는 날, 결국 참지 못하고 발딱 일어났다.
“왜 나 때문이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원이가 또 웅얼거렸다.
“알아듣게 말해!”
“엉니는 아빠한테 왔잖아. 나도 아빠한테 가고 싶다고.”
순간, 멍해졌다.
이 집에 있는 아빠는 나의 아빠다. 지원이의 엄마가 나에게 아줌마인 것처럼, 아빠도 지원이에게는 아저씨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_<동생년> 118~119쪽에서


교실로 오자 앞자리에 있던 남자애가 알은체를 했다. 전학 온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말을 거는 유일한 아이였다.
“이제 너냐?”
무슨 뜻이냐고 묻는 나를 향해 남자애가 돌아앉았다.
“이거 K가 줬지? 좀만 있어 봐. 편의점, 식당, 나중엔 비싼 맛집에 가서 사 줄걸. 3년 동안 꾸준히 퍼 주는데도 쟤, 친구가 없다, 없어.”
더 이상 다가갈 애가 없으니 이제 전학생인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나도 어제 로제 떡볶이를 얻어먹었다.
“왜?”
같은 반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K가 무리를 만들어 몰려다니거나 나서서 아이들의 괜한 미움을 사는 부류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답 노트니 학습 계획이니 하는 걸 보면 공부에도 충실한 것 같았다.
남자애가 내 표정을 보고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며 키득거렸다.
“착하고 친절하지? 맞아, 그런데 그게 사람을 질리게 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남자애는 책상을 치며 웃었다. _<잘 모르던 아이> 141~142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