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출판사
도서정보
고장난 하루
아나 알론소·하비에르 펠레그린
2019. 08. 30
9,000원
136 페이지
9791189208325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모두 길을 잃은 건 아니다.”
 
남몰래 앓는 강박증 때문에 꿈도 미래도 불투명하기만 한 아나. 갈고
리 같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발작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오늘도
필사적으로 자신과 싸운다. 이대로 영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까 봐, 언제까지나 환자인 채로 살게 될까 봐 두렵기만 한데…….
어느 날, 굳게 닫힌 아나의 세계 속으로 한 남자아이가 성큼성큼 걸
어 들어와 손을 내민다.
 
고장난 마음 때문에 산산조각 난 삶을 빛으로 바꾼
열여섯 소년 소녀의 용기 있는 도전과 우정 이야기!
 
 
 
출간의 의의
불안한 마음이 보내는 위급 신호!
사람들에게는 꼭 지켜야 하는 자기만의 습관이나 규칙이 있게 마련이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을 깨끗이 씻는다든지,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할 때 정해진 순서가 있다든지, 물건을 정리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든지, 가스 밸브나 현관문이 잘 잠겼는지 수차례 확인한다든지 등…….
그런데 이런 사소한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 ‘정도’가 지나쳐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까지 지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습관에 집착할수록 불안감이 심해지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닐 뿐더러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불안한 마음’이 보내는 위급 신호일 확률이 높다. 바로 오십 명 중 한 명꼴로 앓고 있다는 ‘강박증’ 이야기다.
강박증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떤 생각이나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 불안해지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질병이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숨기는 경우도 많아서, 질병이라고 인지하고 치료를 받기까지 9~17년이 걸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이다. 누구에게나 걱정과 불안이 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연구해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고장난 하루》의 주인공, 아나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강박증을 앓는 열여섯 살 소녀 아나가 처한 혹독한 현실과 녹진한 내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도전을 감행하며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정밀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애정과 원망이 뒤섞인 주변 사람들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 강박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과 반응에도 초점을 맞추어 ‘마음의 병’을 끌어안은 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소년들이 처한 ‘막막한 오늘’을 현실감 있게 보여 준다.
 
 
 
간략한 소개
너의 잘못이 아니야 : 강박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특별한 제안
아나의 하루는 수없이 많은 규칙과 습관으로 꽉 채워져 있다. 고장난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또 다른 나’, 즉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튀어나와 날뛰는 걸 막기 위해서다. 불길한 생각을 불러오는 단어는 공책이 새까매질 정도로 빽빽하게 쓰거나 반복해서 읊조려야 하고, 황당한 이유를 들어서까지 출입문을 여러 번 통과해야 하며, 손을 쓰라릴 정도로 씻기도 한다. 목록을 만들어 놓고 아침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제비를 뽑고, 결정하는 게 어려울 때면 짝수와 홀수에 맞춰 답을 정한 뒤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주사위를 던진다.
터무니없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감당할 수 없는 불안 앞에서 아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일들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강박증을 앓으면서 몇 번의 발작을 일으킨 뒤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자발적인 ‘왕따’로 지내기까지 한다. 그런 아나에게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꿈이 있다. 고대 이집트 문화와 네페르티티 왕비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코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다.
강박증은 이렇게 아나에게서 평범한 일상, 자존감, 친구, 그리고 꿈과 미래까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게다가 대학에 입학해 독립한 뒤로 집에 발길을 끊은 오빠, 아나를 돌보는 것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사건건 대립하는 부모님까지……. 아나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통받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늘 초긴장 상태로 ‘정상’을 연습하는 아나 앞에 어느 날, 한 남자아이가 나타난다. 이제 막 전학을 온 브루노는 아무런 편견 없이 아나의 장점과 매력을 발견해 관심을 갖는다. 덕후가 될 정도로 푹 빠져 있는 작품인 《반지의 제왕》 속 요정 아르웬을 닮은 아나의 외모도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이집트 문화에 박학다식하고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브루노는 용기를 내어 아나에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며 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치명적인 비밀을 간직한 채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없었던 아나가 고심 끝에 강박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브루노에게 털어놓으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브루노가 큰 충격을 받고 주저하며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이자 아나는 크게 상처를 입는다. 그런 와중에 브루노는 강박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힘이 닿는 데까지 아나를 돕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나가 좋아하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보여 주기 위해 추진하던 베를린 수학여행을 노출 치료의 계기로 삼기 위해 아나 부모님까지 설득한다. 오랜 준비 끝에 베를린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몇 번의 실수가 아나의 증상을 악화시켜 친구들 앞에서 경미한 발작을 일으키고 만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더 이상의 여행은 불가능해지고 마는데……. 과연 아나와 브루노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살기
《고장난 하루》는 강박증의 벽에 갇혀 삶이 헝클어진 열여섯 살 소녀가 다부진 의지와 주변의 애정 어린 도움을 통해 ‘나는 내가 가진 질병 그 이상의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가슴 뭉클하게 그리고 있다.
한쪽 눈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동질감을 느끼던 아나는, 작품의 말미에서 마침내 흉상의 정면을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게 완벽해야만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 단점과 약점 때문에 불완전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있는 그대로 완벽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아나가 강박증이라는 벽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 ‘나 자신’으로 살기를 결연히 다짐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이렇듯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면에 사로잡혀 가능성을 낮추어 생각하고 한계를 지었던 독자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아나와 브루노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교차해 펼쳐놓음으로써, 하나의 상황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업 시간의 발표가 아나에게는 진땀나는 실패의 기억이지만 브루노에게는 아나를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첫 데이트 이후 마냥 행복해하며 아나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꽉 찬 브루노와 달리, 아나는 다시는 그런 행복감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고통스러운 발작을 일으키고 만다. 이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환상과 기대를 품은 채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이지 않은 상태로, 표면적으로는 관계가 순탄하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나가 강박증을 고백한 시점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브루노는 아나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맞닥뜨리고 이해하는 동시에, 강박증이 아나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로소 허상이 아닌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온전히 끌어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나 또한 자신의 병을 스스로도 외면하고 감추는 데 급급했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강박증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단단한 마음을 품게 된다.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던 무모한 도전을 가까스로 성공시킨 기억, 그 소중한 추억에 기대어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서로를 통해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는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관계’가 가진 힘과 온기를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고장난 하루》는 자신의 의지와 주변 사람의 지지 덕분에 강박증이 완치되어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안일한 결말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아나의 증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하고, 타인의 불행을 관찰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누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브루노나 가족과의 관계가 꽃길을 걷듯이 순탄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나 내면의 용감하고 명랑하며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영혼의 일부가 되살아났음을 당당하게 보여 준다. 완벽한 해피엔딩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 나가며 한 땀 한 땀 완성해 가는 아나와 브루노의 특별한 도전이 독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지은이 : 아나 알론소 Ana Alonso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으며, 레온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여덟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이페리온 상, 안토니오 마차도 상, 오호 크리티코 데 포에시아 상을 받았다. 지금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지은이 : 하비에르 펠레그린 Javier Pelegrín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으며, 무르시아 대학교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톨레도 지방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아나 알론소와 하비에르 펠레그린은 《이프의 비밀》과 《가짜 블로거》를 함께 썼으며, 세 번째 작품인 《고장난 하루》는 2015년에 ‘아나야 어린이·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 김정하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스페인 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어린이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스페인어권의 좋은 어린이 책을 읽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도서관을 훔친 아이》 《구멍에 빠진 아이》 《아버지의 그림 편지》 《가짜 블로거》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룰까요?》 외 여러 권이 있다.

1학기 
강박증의 벽에 갇히다
눈에 띄는 아이
나랑 영화 보러 갈래?
두근두근 첫 데이트
또 다른 나
상상과 현실 사이
섣부른 고백
위태로운 만남
시도해 볼 권리
짜릿한 첫 키스
별이 반짝이는 시간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새로운 도전
 
 
2학기 
고장난 하루
무모한 도전
꿈과 현실 사이
체념, 그 너머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
우리들의 특별한 시간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나랑 영화 보러 갈래?
아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앓아 온 강박증 때문에 자발적인 ‘왕따’로 지낸다. 발작을 피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반복하기도 하고, 특정 단어를 연거푸 말하기도 하며, 손이 부르틀 때까지 씻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며 조심하지만, 불안은 그림자처럼 아나 곁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꿈도 미래도 불투명한 데다 친구조차 사귈 수 없는 외로운 나날이 계속되면서 아나의 절망도 깊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전학생인 브루노가 아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데이트 신청은 기쁨과 걱정을 동시에 불러오고, 엄마의 반대로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아인오아는 5학년 때 이후로 우리 집에 발길을 뚝 끊었다. 내가 아인오아에게 방문을 두 번씩 드나들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애가 내 말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통제력을 잃고 마구 날뛰었으니까. 아인오아는 그 전에도 여러 번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그때는 군말 없이 내 방문을 두 번씩 통과해 주었다. 그게 놀이라고 생각해서 순순히 따라 주었는데, 그날 오후에는 어째선지 하기 싫다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내가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맞섰다.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벽에다 머리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아인오아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러 댔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고 엄마가 달려왔을 때, 내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날, 나는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중략)
나는 재빨리 방에 들어와 콕 틀어박혔다. 브루노도, 영화도, 그 모든 바보 같은 생각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금요일이 올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 집요하게. 주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때까지…….
아, 해결책이 하나 있었다. 주사위!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서 주사위를 꺼냈다. 하얀 점이 박혀 있는 빨간색 주사위로, 두 개가 똑같이 생겼다. 손에 들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결정하는 게 어려울 때면 주사위를 자주 사용했다. 짝수가 나오면 이렇게, 홀수가 나오면 저렇게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서. 무척 예민해져 있을 때는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주사위를 던지기도 했다. 어떤 바지를 입을지 고르기 위해서, 어떤 과목부터 공부할지 정하기 위해서, 어떤 과일을 먹을지 선택하기 위해서…… 쉼없이 주사위를 던졌다.
‘짝수가 나오면 브루노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거야. 홀수가 나오면 안 가고…….’ ―20~28쪽에서
 

별이 반짝이는 시간
설레는 첫 데이트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브루노와 달리, 아나는 등교도 거부하며 집에서 고통스러운 발작에 시달린다. 게다가 치료법을 놓고 엄마와 아빠의 의견이 달라서 심각한 싸움이 벌어지자, 아나는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놓는 자신의 병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한편 브루노는 아나가 좋아하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이 있는 베를린으로 수학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하며 친구들을 설득하겠노라 공언한다. 부모님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하지만 아나는 일단 그 제안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아나는 브루노와 가까워질수록 증상이 완화되는 걸 느끼면서 조금씩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브루노에게 털어놓을 준비를 한다.
 
이 목록은 내 삶의 축약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증상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사이트에 올라와 있지 않은 다른 증상들도 있다. 나는 목록을 만들어 놓고서 아침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제비를 뽑아 결정한다. 또 주머니에 주사위를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등교할 때마다 이쪽 길로 갈지, 저쪽 길로 갈지를 결정한다.
브루노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증상 목록을 만들었다. 그 애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생각이다. 강박증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의사나 상담가가 설명해 주는 것처럼 정돈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들 같은 것 말이다. 그걸 하지 않으면 공황 상태에 빠져서 조절 능력을 잃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니까. 그럴 때 내 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미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문을 두 번씩 넘어가야 하고, 식사 전에는 손을 정확히 세 번 씻어야 하며, 어떤 단어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써야만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미쳐 버린 것 같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은 매일 일어나는 몸짓이고 말이고 행동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 그런 척 숨기는 법을 배웠다. 내가 하는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을 주변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게 하는 방법을. 아이들은 내가 좀 우스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거나 화장실에 너무 자주 간다고 생각할 뿐이다.
목록을 보다 보니 문득 슬퍼졌다. 두려움, 상처, 반복 행동이라는 단어들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결코 작동하지 않을 쓸모없는 마법으로 고통을 막아 보려는 반복 행동, 언젠가는 죽게 될 가엾은 인간. 브루노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68~70쪽에서
 

새로운 도전
베를린으로 수학여행지가 결정된 것을 두고 아나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한 브루노는 실망한 기색을 드러낸다. 아나는 브루노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강박증을 앓고 있기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기 힘들다고 고백한다. 브루노가 충격받은 걸 감추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아나는 두 사람의 사이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깊은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강박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브루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아나 곁에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는 아나의 집으로 찾아가 수학여행을 계기로 노출 치료를 시도해 보자며 아나와 부모님을 설득하기까지 한다.
 
“제가 이 문제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도 아나는 특별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라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빠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시도해 보고 싶은 게 대체 뭐지?”
주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브루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2학기 때 베를린으로 수학여행을 갈 예정이에요. 그곳의 노이에스 박물관에 아나가 좋아하는 네페르티티 흉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아이들을 설득해서 베를린으로 가게 됐어요.”
엄마는 브루노의 말을 끊었다.
“아, 그 이야기는 우리도 들어서 알고 있어. 하지만 아나는 수학여행을 갈 수 없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곤 방법이 없거든.”
브루노는 강하게 반박했다.
“그 현실을 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아나에게는 여행을 할 권리가 있어요. 누구보다 그 여행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왜 시도해 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거죠?”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브루노, 난 언제나 시도하고 있어.”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브루노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이번 시도는 지금까지 해 온 것들과 다를 거야. 노출 치료가 뭔지는 알지? 사람들 말로는 제법 효과가 있대. 여행 준비를 하면서 노출 치료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우리가 도와줄게. 사실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아직 잘 모르지만,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 네 곁에서 무슨 일이든 함께할게.” -88~89쪽에서
 

고장난 하루
아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브루노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노출 치료를 시작한다. 다행히 증상이 완화되어 수학여행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사히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지만, 간밤에 잠을 설친 데다 비좁은 좌석,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환경 때문에 점점 불안감이 커진다. 결국 아나는 환승을 위해 내린 취리히 공항의 보안 검색대에서 경미한 수준의 발작을 일으키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여행은 초반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데…….
 
“아나, 제발 진정해. 안 그러면 문제가 커질 거야.”
그러고는 검색대를 통과한 사람들이 물건을 찾는 테이블 모퉁이로 나를 끌고 갔다. 에바 선생님은 그제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차리고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다리오 선생님이 보안 요원에게 영어로 뭔가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에바 선생님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브루노가 나에게 신발을 얼른 신으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보안 검색대를 다시 통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문제가 생길 거야. 탑승구는 E34 게이트니까 아나를 그리로 데려가. 부모님께 연락해야 할까?”
“아니에요. 진정됐어요. 걱정 마세요. 탑승구에서 뵈어요.”
브루노는 에바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온몸을 덜덜 떨면서 아이처럼 흐느껴 우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눈물도 닦아 주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아나,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나를 설득하려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브루노가 정말로 불쌍해 보였다.
나는 이 여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 애가 기울였던 모든 노력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우리 부모님을 설득했고,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곁에서 함께 들어주었으며, 내가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대기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 주었다.
그 모든 것을 소용 없는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도는 해 보아야만 했다. 몸이 계속 떨렸지만 브루노의 도움으로 신발을 신은 뒤,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탑승구로 걸어갔다. 통로, 문, 불빛,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게 너무 크거나 작아 보였다. 눈에 보이는 색깔들은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는 제시간에 탑승구 앞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수군거리면서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해냈으니까. 여기에 함께 있으니까. 하지만 다음번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99~10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