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출판사
도서정보
칼날 위의 삶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2024. 01. 30
18,000원
140*210mm/ 296페이지
9791156754527

“내게 수술은 인체 해부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탐구였다.”
세계 최고 뇌종양·말기 암 전문 신경외과 의사인 라훌 잔디얼 박사가
수술실과 병동에서 목격한 생과 사의 경계

수술로 몸의 절반을 잃은 30대 남성,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싶어 몇 달이라도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40대 여성, 어린 나이에 뇌사를 맞고 사망 선고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19세 소년, 수술의 후유증으로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년 여성……. 이들은 제각기 다양한 증상과 질병과 사연을 지녔지만, 모두 생과 사의 기로에 놓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생명줄’을 쥔 의사는 이 환자들에게 삶의 기회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병실과 수술실에서 고군분투하며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목격한다.
세계 정상급 뇌종양 전문 외과 의사이자, 말기 암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의 소회를 솔직하게 담은 회고록 《칼날 위의 삶(원제: Life on a Knife's Edge, 심심刊)》이 출간되었다. 이 책을 쓴 라훌 잔디얼은 뇌종양과 말기 암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신경외과 의사로, 가장 건드리기 예민한 부위인 뇌를 열어 종양을 제거하며 수천 명의 삶을 연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암 연구 전문가로서 100여 편의 논문과 수많은 의학 도서를 집필한 저자는〈선데이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작인 《내가 뇌를 처음 열었을 때》에서 신경학자로서 뇌의 작용과 활용법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한 명의 의사로서 병실과 수술실에서 겪은 경험과 환자들의 사례에서 길어 올린 삶에 대한 통찰을 총 10가지 키워드에 담아냈다. 트라우마, 자아, 상실, 삶 등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통해 저자는 환자들의 사례를 살피고, 치료 과정에서 만났던 어려움과 깨달음을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죽음 앞에서 환자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와 저자의 통찰이 담긴 이 책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건넨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이 책을 “빠른 속도감을 갖춘, 때때로 충격을 주는 생생한 글”이라고 평했으며, 《호흡의 기술》 저자인 제임스 네스터는 “인간의 생물학적 내면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며 찬사를 보냈다.

뇌는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고, 회복한다
난관을 넘어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한 뇌 과학의 세계

신경외과 의사인 저자는 환자들의 뇌를 들여다보고 마음과 자아에 관해 고찰할 기회가 많았다. 외상 소생실에서 응급 환자 처치를 돕다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기도 하고(23쪽), 뇌에 전극을 대 데이터를 파악하는 매핑 작업을 통해 환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기도 한다(145쪽). 이처럼 저자는 인간의 뇌를 속속들이 탐구하며 그 속에 숨은 ‘자아’까지 두루 살피고, 자아가 우리의 몸과 마음,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들여다본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자아감, 즉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깊이 배우고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고유의 자아의식을 제공하는 주체는 무엇일까? 과거 오랫동안 이 문제의 답은 영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뇌가 유일한 답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81쪽)

우리의 자아의식은 뇌섬엽이라는 뇌 부위에서 발생하며(81쪽), 이곳에 손상을 입으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다. 한 환자가 뇌에서 림프종에서 생겨나 뇌섬엽 옆까지 뻗어간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오른쪽을 통째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측 편측무시’ 현상을 보이는 것을 보고 저자는 “뇌가 아닌 ‘정신’이 유지하는 자아의 서사가 얼마나 큰지 실감”한다(86쪽). 또한 저자는 자아가 뇌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으며, 그 방식이 생각에 영향을 미쳐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믿음, 기억과 역사, 희망과 갈망에서 생겨난 독특한 내면의 이야기, 즉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흡수해서 이들을 진행형 서사로 엮어내는 능력을 자서전적 기억이라고 하고, 이는 스스로의 자아를 바라보는 기반이 된다.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창조하는 이 신비로운 나비는 우리의 순간을 한데 묶어준다. 만약 자아와 자서전적 기억이 동일한 페이지상에 있지 않으면, 기억은 핵심 믿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96쪽)

저자는 이 사실에서 착안하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각종 난관에 부딪혔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뇌와 관련된 각종 과학적 지식에서 답을 찾아간다. 신경외과 의사로 20년간 쌓은 임상 경험이 최신 뇌 과학과 다채롭게 결합하여, 읽는 이에게 풍부한 지적 고양감과 신선한 느낌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자아와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을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위협으로 생기는 스트레스를 만나더라도 이를 좋은 방향으로 승화하는 회복탄력성을 믿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면 되고(181쪽), 자신감을 잃어갈 때는 호흡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며 다시 집중력을 모으면 기회를 되찾을 수 있고(225쪽), 뜻하지 않게 트라우마를 만나더라도 적극적으로 맞서면 상처를 치유하고 공포를 소멸할 수 있다(36쪽). 뇌 수술과 뇌 과학은 저자에게 곧 삶을 헤쳐 나가는 강력한 열쇠이자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다.

뇌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에게는 뇌를 조정하고 이용할 힘이 있다. 환자들은 뇌 수술을 받은 후 잃어버린 기능을 회복한다. 따라서 여러분이 건강한 뇌를 가지고 있다면 본인이 위협과 맺는 관계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능력은 모두 사고의 가소성에 달려 있다. (…) 우리가 역경을 겪으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통합하는 대처 방법을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위협에 대처하려고 우리가 선택하는 전략은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180쪽)

이뿐 아니라 본인이 집도하는 수술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저자의 필체는 읽는 이에게 직접 뇌 수술을 지켜보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저자는 뇌에서 일어나는 각종 놀라운 기능을 설명하며 이것이 우리의 몸과 정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신경외과 의사로서 얻은 깨달음을 차분히 풀어 나간다.


의사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매초 판단의 순간에 놓인 의사, 한계와 자격을 묻다

저자의 전문 분야인 신경외과는 메스가 단 몇 밀리미터만 어긋나도 환자가 영구적인 상해를 입을 수 있는, 수술의 위험도가 높은 분야다. 신경외과 의사는 민감한 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아주 작은 오차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수술한다. 1초의 판단, 1밀리미터의 차이가 환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현장에서 외과 의사에게는 현명한 판단을 빠르게 내리는 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응급실에서 상급자가 없는 상황에서 외상 개두술을 감행하거나(1장), 암이 목과 머리로 전이되어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환자가 사망할 수 있는 수술을 시도하기도 하고(7장), 2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를 살피는(9장) 등 정신적으로 강도가 높은 수술과 진료를 이어나간다. 이 과정을 묘사하는 빠르고 강렬한 서술은 저자가 극복해야 했던 수많은 위기의 긴박함을 잘 드러낸다.
저자는 의사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지, 유능한 의사의 조건은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의사로서의 자신을 채찍질하는 저자의 성향은 한 12세 환자의 수술에서 의료 사고를 낸 후 심화된다(6장). 환자의 허리를 수술한 후 마무리하는 작업에서 약해진 신체 부위를 보강하는 대신 합병증이 적도록 손을 덜 대는 방향을 택했다가, 환자의 허리가 완전히 주저앉고 아직 어린 환자가 앞으로 영영 걸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잘못된 실수, 그것도 수술 합병증 중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합병증을 일으킨 죄인”이라는 죄책감과(111쪽) 의사로서 실패했다는 수치심이 몰려와, 의사로서 품고 있던 자존심이 한순간 무너지고 “내 자신이 사기꾼 같은 기분”이 드는 등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자신이 무능한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난도가 높은 수술을 집도하는 일에 스스로 “중독”되었다고 할 정도로 매달린다(7장). 이토록 가혹한 난이도의 수술을 이어나가다 보면 당장 완수해야 하는 작업의 성공 여부에 함몰되어, 수술은 결국 환자를 위한 것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놓치기 쉽다. 실제로 저자는 “외과 의사는 환자보다 그 환자가 받을 수술에 관심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수술의 성공 여부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며 ‘유능한 의사’로서의 업적을 이어간다. 한동안 실패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저자는 오랜 시간 실패에 부딪힌 후, “수술이 가능하다 해도 치유는 별개이며 훨씬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나서야”(210쪽) 비로소 자신을 향한 회의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바로 환자들과의 진심 어린 대화였다.

이 절망의 시기는 결과적으로 내게 큰 변화를 가져왔고, 자신의 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내 공감도와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패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취약성을 이해하는 데 자산이 되어주었다. (…) 나에게는 새로운 공감의 저장고가 생겨나고 있었다.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나에게는 겸손이 생겨났다. 이제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좀 더 분명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고통 안에서 세상에 속할 기회가 있었다. 고통을 겪는 환자들은 의사인 나도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다. 우리는 이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 (114쪽)


“수술은 산의 정상이 아니다. 환자의 여정이 산의 정상이다.”
환자들에게서 배운 진실한 마음과 삶을 향한 태도

저자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만큼, 삶의 마지막 순간을 목전에 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만난다. 개중에는 20년간 쉬지 않고 수천 번의 진료를 이어온 저자도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희귀한 질환을 앓는 환자들도 있다. 죽음이 예상치 못한 시기와 방법으로 자신을 덮쳐오는데도, 환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한다. 일례로, 저자가 치료한 한 환자는 몇십 년간 여러 번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으며 생명을 연장해오다, 결국 노년에 접어든 후 뇌 수술의 후유증으로 눈꺼풀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인 ‘감금증후군’에 빠지고 만다(10장).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게 된 환자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장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무엇이 두려운가요?”라는 의료진의 마지막 질문에 환자는 평온하게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죽음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 장기 기증이라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방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후 삶을 마칠 것을 택한다. 환자는 마치 “그게 자신의 권리이자 삶이고, 그가 새장에서 벗어날 기회임을 내가 마침내 깨닫기를 기다리는 듯했”다고 저자는 말한다(282쪽).

환자는 그런 복잡한 수술을 나에게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마치 내가 슬픔을 정리하고, 자신의 결단을 이해해주기를 기다린다는 듯했다. 그는 몇 년간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기능에 가해졌던, 느리지만 가혹한 위협을 견디며 살아왔다. 어쩌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슬픔의 단계를 다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깜박이면서 이건 가라앉는 배에서 보내는 필사적인 모스부호와는 완전히 다른 신호라는 것을, 영혼을 살려달라는 것이 아닌 영혼을 놓아달라는 신호임을 분명히 밝혔다. (283~284쪽)

저자는 이 환자의 사례에서, 그리고 그 외 자신이 만나는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에서 진실한 삶을 향한 태도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죽음은 갑작스레 찾아와 이때껏 쌓아왔던 생과 이별할 것을 종용한다. 환자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곧 고통스러운 상황을 돌파할 자신만의 방법을 조금씩 찾아나간다. 작가이자 애도 전문가인 데이비드 케슬러에 따르면 “비극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슬픔이 좀 더 평화로워지고 심지어 희망찬 것으로 바뀔 수 있”으며, 그래야만 비극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263쪽). 환자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고, 투병과 죽음이라는 비극 속에서 어떤 것을 택할지 숙고하고 답을 내놓는다. 말기 암으로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암 연구에 본인의 종양을 사용하라는 뜻을 밝히기도 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가장 가까운 가족의 장기를 다른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기증하기도 한다. 저자는 그 눈물겨운 과정을 함께하며 환자가 어떤 마음으로 병과 죽음을 대하는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환자의 뇌와 그 속에 깃든 인간의 정신이 투병이라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저자는 수술이 결국 환자를 위한 것이며 수술을 성공시키는 것보다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환자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환자들이 죽음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자는 깊은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그 순간, 나는 내 환자와 인간애를 공유했고, 앞으로 배울 게 정말 많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삶, 상실에 관한 교훈과 생존의 법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 뇌 속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우리 마음속에도, 내 환자에게도, 수술실에서도, 내가 진료할 때도 존재하며, 이들은 생과 사, 희망과 무기력함의 경계 속에서 작동한다. 삶의 벼랑 끝과 깊은 골짜기에서는 삶의 높이도 드러난다. 어떤 비극이나 승리도 영원하지 않다. 수술 자체에 강렬한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없었다. (…) 환자를 포용하고 의료 시스템에 의문을 던지자. 수술은 산의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환자의 여정이 산의 정상이다. (210~211쪽)

소위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탓에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주변에서 많이 받지만, 저자는 자신이 환자와 함께했던 여정이 “인간의 나약함, 용기,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고마운 과정이었다고 말한다(11쪽).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에 대한 애정과 인간미, 피와 땀과 눈물이 밴 저자의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뭉클한 감동을 준다.

환자는 저마다의 생존 방식이 있다. 모든 환자가 질병에 잘 대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초월적인 수준으로 마음의 본질에 접근해 힘든 상황에서도 성장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며 승리를 거둔다. 이런 사람들에게 병의 진단은 삶을 구속하는 방해물이 아니었다. 이들은 죽음 또는 죽어간다는 사실에 눈이 머는 대신, 진정한 삶의 우선순위를 발견하고 오랫동안 인생에 방해가 되었던 부차적인 것들은 옆으로 제친다. (…) 나는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대부분 내 환자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290쪽) 

라훌 잔디얼(Rahul Jandial) 지음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이자 뇌 과학자. 미국 로스앤젤레스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암 연구에 정진하는 길을 택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의 국립암연구소에서 선정한 통합 암 치료 전문 기관인 시티 오브 호프City of Hope 재단에서 ‘잔디얼연구소’를 운영하며, 암이 뇌로 전이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에 힘쓰고 있다. 비영리기관 국제신경외과어린이지원협회International Neurosurgical Children’s Association를 창립해,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동남아시아·동유럽·남아메리카의 어린이들을 정기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잔디얼은 암 연구에 몰두하며 10권 이상의 의학 서적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출간했고, 그 성과로 2019년 〈선데이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상, 2015년 미국 국방부 유방암 연구 혁신상, 2008년 UC샌디에이고 유명 강의상, 2007년 펜필드 연구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 저서로 《내가 뇌를 처음 열었을 때》가 있다.


정지호 옮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전공하고 성균관대 번역대학원에서 문학(번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상 및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번역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책이 좋아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루틴의 힘》,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 《우리 시대를 살아가기》, 《인간의 조건》 등이 있다.

머리말 ─ 나는 환자의 뇌에 칼을 대는 의사다 9

1 트라우마 ─ 몸과 마음에 숨은 상처 15
2 몰입 ─ 의사에게 필요한 능력 41
3 자아 ─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65
4 실패 ─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할까 99
5 믿음 ─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129
6 위협 ─ 위기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153
7 중독 ─ 유능한 의사라는 증명 187
8 가치 ─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 213
9 상실 ─ 비극에서 찾은 의미 239
10 삶 ─ 환자들이 가르쳐준 인생의 태도 267

감사의 말 293

외과 의사는 환자보다는 그 환자가 받을 수술에 관심이 더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수술을 한 적이 없다. 내게 수술은 인체 해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탐구였다. 나는 수술이라는 기술의 덕을 많이 보았다. 수술은 나와 환자를 발가벗기고, 둘의 사활을 칼날 위에 올려놓는다. 수술은 외로운 상황이 될 수 있고, 쉬운 답은 거의 없다. (10쪽)

현재, 나는 사람의 몸에서 악성종양을 제거하는 외과 의사다. 40대인 지금까지 1만 5천 명 이상의 환자를 만났고 4천 건 이상의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은 우리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에 상처를 입힐 수 있지만, 우리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11쪽)

내가 환자와 함께했던 여정은 인간의 나약함, 용기,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상급자 코스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치료하려고 내 자신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그동안 내가 환자와 함께 겪었던 윤리 문제와 갈등에 대처한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 나는 이 책에서 내 삶과 일의 깊은 골짜기에서 건져 올린 교훈과 통찰, 그리고 우리의 탁월한 뇌와 귀중한 생명에 관해 환자들이 가르쳐준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이들에게 영원히 빚을 졌다. (11~12쪽)

일부 뇌종양 환자는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 이들은 가급적 빨리 자신의 죽음을 냉철히 바라보아야 한다. 생의 결승선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환자는 당장 그 선을 밀쳐내고 싶다. 몇 달이라도, 몇 년이라도 더 살 기회를 잡으려고 눈앞에 닥친 건 무엇이든 한다. 그러다 보니 환자는 치료를 한 번 받고 나서 회복할 겨를도 없이 검사 결과를 듣고, 그 결과에 따른 치료를 또 감당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암 센터에 가는 것. 이건 내 눈에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30~31쪽)

요즈음에도 치명적인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나를 찾는다. 나는 이에 감사함을 느낀다. 내 기술로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으니 그게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이런 순간이 두렵지 않다. (55~56쪽)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믿음, 기억과 역사, 희망과 갈망에서 생겨난 독특한 내면의 이야기, 즉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흡수해서 이들을 진행형 서사로 엮어내는 능력을 자서전적 기억이라고 하고, 이는 스스로의 자아를 바라보는 기반이 된다. (…) 역경에 맞서 싸워야 할 때, 상상 속의 미래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할 때, 우리의 자서전적 서사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런 불쾌한 사건, 좌절, 실패를 목적과 회복의 서사로 엮어내는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마주하는 난관에 맞게 자신의 정신 상태를 단련하고 생각의 흐름을 이끌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고유의 역량이 있다. (96~97쪽)

나에게는 새로운 공감의 저장고가 생겨나고 있었다.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나에게는 겸손이 생겨났다. 이제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좀 더 분명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고통 안에서 세상에 속할 기회가 있었다. 고통을 겪는 환자들은 의사인 나도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다. 우리는 이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 (114쪽)

뇌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에게는 뇌를 조정하고 이용할 힘이 있다. 환자들은 뇌 수술을 받은 후 잃어버린 기능을 회복한다. 따라서 여러분이 건강한 뇌를 가지고 있다면 본인이 위협과 맺는 관계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능력은 모두 사고의 가소성에 달려 있다. (180쪽)

사람들은 암 전문 외과 의사로 일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질문에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라고 대답한다. 내 환자는 심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나에게 용기를 준다. (…) 이들은 왜 암 진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삶의 질을 우선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한다. 암 환자들의 위기 관리는 내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 나는 그들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었다. (183쪽)

나는 수술의 영광이 아닌 수술 과정에 집중하면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술 자체에 강렬한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없었다. 내 통제 밖에 있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사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되 이후에 오는 인생의 부침도 즐겨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장인이 되자. 단순해지자. 환자를 포용하고 의료 시스템에 의문을 던지자. 수술은 산의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환자의 여정이 산의 정상이다. (210~211쪽)

놀랍게도 많은 환자가 암을 상실로 보지 않는다. 이들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삶의 마지막 장은 암에 걸리기 전에 꾸렸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진혼곡이 아니라, 암이라는 병에 걸렸어도 끝까지 존재감을 발휘하는 시간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에 집중한다. (…) 암 환자는 대재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암 환자는 내게 ‘수준 있는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이 단순한 우선순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임을 보여주었다. (246~247쪽)

일부 암 환자들이 조기 단계 임상 실험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도 비극적인 상황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자신의 운명은 끝이 나더라도 의학 발전에 이바지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제인 같은 암 환자들은 사후 신속한 부검을 위해 본인의 시신을 기증한다. (262쪽)

상실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상실로 인해 심히 절망하고 가슴 깊이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상실과 삶이 맺은 깊은 유대감과 애착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나는 환자와 이들 곁의 소중한 사람들의 삶에 상실이 파고드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럴 때마다 가장 날것의 그러면서도 가장 견고한 인간애를 발견했다. (266쪽)

장기 기증 의사를 반복해서 밝힌 후, 환자는 치료를 그만 받기를 원했다. 이런 결정은 환자 스스로가 아닌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인공호흡 장치를 떼어내기를 원합니까?” “네.” “인공호흡기를 계속 유지하고 싶으세요?” “아니오.” “호흡기를 떼어내면 당신이 살까요, 아니면 사망할까요?” “호흡기를 계속 유지하면 살까요, 사망할까요?” “죽음이 두려우세요?” “아니면 죽어가는 게 두렵나요?” 근육의 수축이 전혀 없는 멍한 얼굴에도, 환자의 눈은 정말 평온해 보여서, 마치 그게 자신의 권리이고, 자신의 삶이고, 새장에서 벗어날 기회임을 내가 마침내 깨닫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가요?”라고 물었다. 환자는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281~282쪽)

그 순간, 나는 내 환자와 인간애를 공유했고, 앞으로 배울 게 정말 많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삶, 상실에 관한 교훈과 생존의 법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 뇌 속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우리 마음속에도, 내 환자에게도, 수술실에서도, 내가 진료할 때도 존재하며, 이들은 생과 사, 희망과 무기력함의 경계 속에서 작동한다. 삶의 벼랑 끝과 깊은 골짜기에서는 삶의 높이도 드러난다. 어떤 비극이나 승리도 영원하지 않다. (288쪽)

환자는 저마다의 생존 방식이 있다. 모든 환자가 질병에 잘 대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초월적인 수준으로 마음의 본질에 접근해 힘든 상황에서도 성장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며 승리를 거둔다. 이런 사람들에게 병의 진단은 삶을 구속하는 방해물이 아니었다. 이들은 죽음 또는 죽어간다는 사실에 눈이 머는 대신, 진정한 삶의 우선순위를 발견하고 오랫동안 인생에 방해가 되었던 부차적인 것들은 옆으로 제친다.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서서히 생기든 깨달음으로 찾아오든 가장 중요한 변화다. (289쪽)

나는 환자가 감사 인사를 보내면, 어리둥절하며 ‘뭐가 감사하지?’라고 혼자 의아해한다. 그들의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 개입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그들의 시련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나야말로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들은 시련에 맞서며 비극적인 앞날을 무력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이런 태도의 목표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쁨을 음미하고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과정을 창조하는 것이다. (290쪽)